내 손 잡아

fix 2013. 7. 21. 17:23
둘이 서있는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7월의 바람은 더웠고, 달빛인지 가로등빛인지 혹은 빨갛게 물든 볼의 더운 빛인지 모르겠지만 기범의 두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주황빛이 든 볼 위로 투둑 눈물이 줄기를 이루며 떨어진다. 찔끔거리며 우는 것 말고, 눈에 고인 눈물이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돌고 돌아 툭툭 하고 볼을 때리며 떨어졌다. 덥게도 운다. 눈을 꼭 감고 뜰 때마다 매번 눈물 줄기가 떨어졌다. 찝찌름한 눈물의 맛이 입술 끝을 가르고 입속으로도 들어왔다. 눈물을 닦을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빳빳하게 차렷 자세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범이 울었다. 그런 기범을 가만히 보고 있는 종현 역시 별 말도 하지 않고 그런 기범을 보고 있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고백을 한건 난데, 니가 왜 울어."

종현이 쓰게 웃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이고 먹고 싶다던 목이 찢어질 것만 같이 달고 단 케이크도 잔뜩 사먹이고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울려 버리다니. 형편없는 고백이라고 생각했다. 고백을 받고 우는 것은 또 무슨 반응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따귀를 맞는 것과 같이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으므로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말도 않고 울어 버리는 것이 맞는 것보다 낫다면야, 뭐 차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입이 써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울고 싶은건 종현 자신인데 먼저 울어 버리는 것이 답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놀라지 말라고, 말했잖아..."

괜히 땅을 내려다 보며 발 끝을 툭 찼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같이 울어 버릴 것 같아서. 내려다보니 기범의 발 끝이 모아져 있다. 시옷 모양으로 종현을 향해 모아져 있는 가지런하고 깨끗한 운동화코를 보니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울음도 나면서 웃음이 나는 이상한 기분이다. 이제 어떻게 한담. 이렇게 돌아서야 하나. 아니면 달래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울어버리는 상황은 시나리오에 없었다. 나도 좋다며 포옹하는 해피엔딩과 이러지 말라는 정상범주의 반응, 그리고 변태라고 따귀를 맞는 반응 등등을 상상해왔는데 울어 버리니 할 말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멍청아."

얘는 나이도 어린게 꼭 멍청이래. 히끅 거리면서 울음과 뱉은 첫 마디가 멍청이란다.

기범아,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네가 최민호 좋아하고 태민이 좋아하는 그런거 말고 나는 너랑 안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고, 그런거 하고 싶어. 그런 걸로 좋아해. 그리고 많이 좋아해. 오래됐어. 처음에는 동생이었는데 친구가 되었고, 근데 이제는 나한테는 너 친구 아니야. 말하고 싶었어, 미안해.

멋 없지만 진심을 이야기 하고 들어버린 첫마디. 멍청아.

"난, 처음부터 친구 아니었단 말이야."

그 말을 뱉고 이제는 소리 내어 엉엉 운다. 이건 김종현이 상상했던 어떤 반응 보다 좋은 반응이다. 하얀 손등이 빨간 볼과 눈두덩이를 문지르면서 막 운다. 종현이 한 발자국 기범에게 다가 갔다. 눈을 부비지 않는 힘 없이 떨구어진 왼손을 잡았다. 힘없는 손이 작은 종현의 손을 따라 그의 곁으로 왔다. 잡은 기범의 손은 더웠다. 7월의 낮만큼.

"그러면, 이제 내 손... 잡아."
 
같이 가자.
모든 것이 서툴고, 더운 바람에 휘청일 만큼 아직 어리지만, 손을 잡으면 넘어지지 않고 휘청이지 않을거야.
갈 수 있는 데라면 어디든 가자.
준비되면 말해. 같이 가자, 어디든. 그러니까, 이제 내 손 잡아.
우리의 시간은 기적이잖아. 


-

에피톤 프로젝트 <초보비행> 
 

리맨물

fix 2013. 6. 13. 18:18
"담배, 끊으시면 안돼요?"

눈을 뜨자 김종현이 측은한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아니, 이 새끼는 왜 들어온지 석달 밖에 안된 새파란 신입이 팀장 흡연 시간마다 쫓아와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훼방을 놓나, 그래. 혼자 있는 흡연실이 좋아 조용히 눈을 감고 담배가 자작하게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는 이 시간을 매우 좋아하는 나에게, 계속해서 흡연실을 찾아오는 이 신입사원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주제에 흡연실에 당당히 들어와 괜히 흡연자의 양심을 찔리게 만든다. 게다가 옆에 소파 놔두고 강아지처럼 쪼그려 앉은 저 포즈는 또 뭐람.

"팀장님은 담배 잘 안 어울려요."

삐죽거리면 건방진 이야기를 해대는 신입사원에게 대충 시선을 주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사실, 은은하게 민트색이 도는 타이가 아주 조금 옆으로 몰려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목 끝까지 단단히 채우고 있었지만 2% 정도 항상 이렇게 느슨해서 신경이 쓰이게 한단 말이다. 피우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고 나도 모르게 그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었다. 담배 피우지 말라는 이야기에 목으로 덥썩 닿는 손길에 목이라도 조르리라 생각한 것인지 신입의 목이 살짝 움츠러 들었지만 넥타이를 고쳐 메어 주는 나의 손등에 시선이 내려 꽂혔다. 됐어-하고 담배를 짓이겨 물고 뱉자 헤에-하고 함지박 만하게 벌어지는 입, 그리고 웃는 낯. 강아지 같다는 느낌이 꼭 이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담배를 멋으로 피우는 사람도 있나요."
"어? 멋으로 피우시는거 아니셨어요?"

하긴, 내가 어릴 적부터 좀 착해 보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하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야금야금 피워온 담배라 나는 이미 10년 흡연 경력의 소유자다. 그래도 피부도 상하지 않고 항상 냄새에도 신경 쓰니까 사람들은 내 비밀스러운 탈선을 잘 모르기는 했다. 하긴, 그러고 보면 나도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머리 노랗게 염색하고 귀에 빡빡하게 피어싱을 하고서 잔뜩 멋을 부리고 다니는 편이었는데, 그렇게 하고 다닐때도 사람들은 날 순진하게 봤다. 그런 시절도 20대 초반에 잠시지, 요즘은 이렇게 멋대가리 없이 수트로 월화수목금금금 채우고 살지만 말이다.

"왜요? 담배 피우는거 그렇게 안 어울려요?"

쪼그려 앉았던 자세를 탈탈 털며 일어나 내 옆에 앉는 이 신입사원, 아.. 김종현은 신입이지만 나보다 나이가 하나 많다던가. 군대도 안 가고 스트레이트로 졸업해 바로 취직해서 위에 사람들 줄줄 퇴사한 덕에 최단기간으로 팀장 달고 있는 나에 비하면 정말 저- 끝에 있는 사회 초년생이다. 듣자하니 어디 유학을 하다 왔다던데. 뭐, 관심 없으므로 패쓰. 한살 어린 팀장에게 이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쪼르르 달려와 항상 말을 걸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사회 생활은 참 잘할 것 같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팀장이라는 직책에 올라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항상 가시만 달고 사는 나에게 이렇게 다가오는 부하직원은 (심지어 신입이!) 없었다. 그나마 입사 동기인 최대리 정도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사실 나도 되게 쉽고 녹녹한 사람인데 회사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없고 보이고 싶지도 않다.

"담배, 멋으로 피우는거 아닌데 되게 멋있으신데요?"

그러고 또 웃는다. 헤- 입벌리면서. 어디 유학을 자주 다녀왔다고 하더니 가서 여자 꼬시는 선수질만 배워 온 모양. 그건 퇴근하고 회사 건너편 바에 가서 근사한 오피스레이디들한테 날리면 잘 먹히겠군요, 신입사원님. 그래도 여과 없이 자기 기분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라니,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5년 정도 지나니 이런 사람을 만나볼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순진하고 직설적으로 칭찬을 들으니까 꽤 기분이 좋다. 

"어, 팀장님 웃었다."

보고를 생활화 하라 하였지만 내 표정까지 하나하나 보고할 필요는 없는데? 입사한지 석달 정도가 되어도 내 일거수일투족이 신기한 신입사원에게는 내 의미 없는 웃음도 중요한 발견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회사에서는 좀 딱딱하고 싶은데.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자 머슥하게, 혹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는 이마를 긁적였다. 계속 웃으셔도 되는데- 하면서. 지나치게 솔직하다. 이렇게 솔직하기만 하면 커스터머 앞에서 사기는 어떻게 치려고 이러는지. 프레젠테이션도 알고 보면 다 뻔뻔한 사기극인데 지나치게 순수해 보인다. 면접 때 말빨이 장난이 아니라서 뽑았다는 인사과의 이야기가 이제 슬슬 의심이 들 정도.

"사수인 최대리는 잘 가르쳐 줍니까?"
"최대리님이요? 아, 네. 잘 가르쳐주시죠."
"그럼 이렇게 쉬는 시간에 최대리랑 이야기라도 좀 하지 왜 여기 와 있어요? 담배도 안 피운다면서?"

눈치 없는 신입사원님! 요는, 귀찮으니 가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장단 맞춰 주는 것이 귀찮으니 슬슬 가라는 이야기 였는데, 이 신입은 왜 이렇게 눈치 없이 계속 붙어 있는걸까.

"저, 팀장님한테 관심 있어서요."

그리고 또 웃는다. '관심'이라는 단어에 얼굴이 굳으며 확 열이 오른다. 지금, 얼굴 빨개진게 왜 나뿐이지? 그런 말을 뻔뻔스럽게 해놓고서도 배고파서요, 졸려서요- 하듯 헤벌죽 웃는 이 신입사원. 말처럼 보통내기가 아닌게 분명하다.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뭐, 뭐라구요? 되묻는 나에게 또 다시 한번 어퍼컷.

"저, 김기범 팀장님 좋아서 이러는거라구요."

아, KO...


 
김종현 김기범에게 수트를 입히라. 그리고 김종현은 하극상을 시전하여라. 그 배경은 필히 회사여야만 하는 것...
 

수집병

fix 2013. 6. 11. 01:27
요즘 다시 만화책을 모으고 있다. 다른 책도 물론 모으고 있지만 다시 만화책을 사는 것은 공식적으로 8년만의 일. 새로이 책을 구입하며 얼마전에는 보지않는 책과 CD를 죄다 정리했다. 팔 것은 팔고 다시 사야 할것은 목록을 정리하며 책장을 뒤적이는데 박희정 작가의 마틴앤존이 한권 나왔다. 이렇게 썩 좋은 작품을 다 모으지않았다니-, 아쉬워하면서 책은 전권을 소장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쩌면 김종현과 김기범의 이름으로 백편이 넘는 마틴앤존을 그렸을 지도 모른다고. 수많은 세계와 시공간 속에서 반드시 사랑했던 마틴과 존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끝없이 좋기만 한 김종현과 김기범이 있었다. 팬픽은 캐릭터의 고착과 배경의 한계가 보통의 소설보다 좁고, 캐릭터 자체에도 애정이 없으면 금세 티가 나고 재미가 없기 마련이다. 또한 캐릭터가 고정되어 있어 그만큼 클리셰도 많고, 독자들에게도 기본적인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있기에 소설 퀄리티도 기준치가 현저히 낮을 수도 있고. 굳이 내 소설의 등급을 따지자면 나는 삼류다. 철저한 캐릭터빨에다가 캐릭터의 고착, 클리셰 뭐 그런 고질적 문제들이 두루두루 갖추어진 그런 유치한 삼류작. 그래도 즐겁게 쓸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주인공이 김종현과 김기범이었기 때문이다. 박희정의 마틴앤존처럼 다양하고 싶었고 야마다 유기처럼 가볍지만 가슴에 폭 박혀 간질간질하고 싶었다. 정리하면서 후회가 되는것은 장편을 쓰지 못했다는 것. 이제 내가 상상하고 만들어 낼 김종현과 김기범은 거의 소진되었다. 데뷔 초에 상상할 여지가 많을때야 2차 가공이 쉬웠다고 해도 이제는 모두가 너무나 잘 알게 된, 더 이상 만들어진 캐릭터가 불필요해진, 그런 시기가 온 것같다. 자가복제 글들을 올려놓고 봐달라고 하기에도 웃기고. 여튼, 그렇다. 결론을 못내겠네. 야마다유기 같은 감성으로, 박희정 같은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내가 보고싶은 김종현, 김기범이 잔뜩 들어간 유지한 자기위로 글들이었지만 망상 가득하게 글을 쓰던 그때에는 분명 신나고 즐거웠다, 정말. 새벽이라 감성감성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