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묘동에는 김약국이 없다. 하지만 핫핑크 간판의 약국은 있다. 그리고 아줌마고 아가씨고 할 것 없이 김약사를 훔쳐보는 약국 앞 벤치도 저기 앞에 있다. 저 약국 약사아저씨로 말할 것 같으면, 머리가 너무 지끈 거리는 날 미간에 주름 팍 주고 들어가 "두통약 두통만 주세요" 부탁했던 나를 보고 빵 터진 아저씨다. 두통약 두통 좋은데요? 하면서. 아, 약사형... 하지만 유쾌해서 웃고 나왔다. 문득 김기범의 하얀 가운도 멋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긴 손가락에 조금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파리하고 하얀 피부, 하얀 가운. (하악하악) 하지만 환자분들에게는 따뜻한 (♥) 김약사쨔응..
묘한 것을 안다는 뜻의 지묘(智妙)마을 입구에는 김약국 이라는 평범한 이름의 약국이 하나 있다. 핫핑크의 눈에 띄는 간판에 [김약국] 심플하게 세 글자만 박아 놓고 영업을 시작한 지는 거의 3년이 다 되었다. 처음 이 동네에 생겼을 때 보송보송하던 김약사님은 조금 나이가 들어 제법 성숙하고 의젓한 느낌의 미청년이 되어 있었고, 그 약사님이 약국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홀연히 약사님을 데리고 홀홀 가버리는 또 하나의 쾌청년은 지묘동 여자들의 은밀한 눈요깃거리가 되어 주고 있다. 약국이 문을 닫는 6시 정도가 되면 약국 앞 큰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여중생이고 여고생들이고 아줌마들이고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 다들 수다를 떠는 척 김약국에 잔뜩 신경을 쓰고 있다. 동네에 나오는 아줌마들이 뭘 그렇게 입술에 색까지 칠하고 나오는지, 옆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할아버지들은 그 시간만 되면 모여드는 여자들의 등쌀에 못 이겨 집으로 쫓기듯 들어 갔다.
아, 오늘도 왔다. 김약국 셔터맨 쾌청년.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고 툴툴거리며 나오는 미청년. 여중생, 여고생들은 대놓고 사르르 녹아가는 눈빛으로 둘을 보고 있고 아줌마들은 제법 강단 있게 ‘약사님, 가세요?’하며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러면 꺼진 간판에도 불이 다시 켜진 것처럼 반짝반짝하게 ‘네, 퇴근합니다. 건강하세요!’하고 인사를 해주는 것이 이 약사님의 저녁 인사이자 선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디저트. 약사님 옆에 서있는 청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해주면 또 한번 연령을 불문하고 여자들의 가슴 속에 검은 하트가 솟는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김약국 입니다.
2012.05.22 <김약국> 프롤로그